두모악

떻게 김영갑을 알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중산간 제주를 또렷히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동시에 그의 미련스러울 정도로 꿋꿋한 삶을, 비록 그 결과야 어쨌든,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는 이십 대에 처음 만난 제주에 홀딱 반해 일 년에 몇 차례를 오가며 사진을 찍고 그걸로 부족해 아예 제주에 정착해 남은 삶을 오로지 제주의, 특히 중산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데 평생을 바친다. 그리고 루게릭병에 걸려 몸이 온전치 않음에도 남은 힘과 열정 모두를 바쳐 이룩해 남겨놓은 게 바로 두모악갤러리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 중 하나다) 

두모악갤러리에 가기로 한 아침, 날씨가 기가막히게 좋았다. 서귀포 숙소에서 나서니 제주에 머문 지난 사흘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한라산이 우뚝 눈앞에 솟아 있었다. 마치 얼른 오라고 손짓하듯.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김영갑, 그를 만나러 가야했다. 

서귀포에서 잡아 탄 900번 버스는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편리는 있지만 온갖 동네를 모두 거쳐가 대단한 시간이 걸려서야 나를 두모악갤러리 앞에 내려주었다. 




분교를 개조해 만든 갤러리 앞마당엔 가득 정원이 들어서 있었다. 그 불편한 몸을 끌고 이 모든 걸 했다고 생각하니, 경외감이 들면서도 마음이 짠해졌다. 도착했으니 서두를 건 없었다. 시간은 최대한 넉넉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가 가방을 선반에 놓고서 매표를 하고 갤러리로 들어섰다. 매표를 하니 그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된 엽서를 한 장 준다. (처음에 받은 건 노을 사진이었는데 나중에 오름 사진으로 교환했다) 학교 건물이기에 가운데 입구로 들어서면 전시 공간은 좌우 둘로 나뉜다. 좌우 공간 모두에 사진이 있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우측엔 제주방송에서 촬영한 그의 생전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좌측엔 그가 생전 머물렀던 작업 공간이 있다. 

좌우 공간을 느릿하게 걸으며 그의 파노라마 사진을 보면, 볼수록 제주는 왜 파노라마에 담아야 하는지 쉽게 수긍하게 된다. 보통의 사진, 그러니까 사람들이 열광하곤 하는 사진은 대체로 분명한 어떤 느낌에 그 지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김영갑의 사진은 오로지 날것 그대로의 제주가 온전히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바람. 제주의 바람이. 계절을 사진에 표현하는 건 계절마다 가진 특색이 분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어떤 감동을 주기보다 계절 그 자체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진은 드물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엔 온전한 제주가 그대로 ‘있다’. 그뿐이다. 그는 평생 제주에 머무르며 그렇게 제주를 파노라마에 담아냈다. 

건물 뒷편에는 무인찻집이 있었다. 갤러리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곳은, 말 그대로 무인無人, 커피와 차를 마시기 위한 모든 게 구비되어 있고 한켠에는 클래식FM이 적당한 볼륨으로 흐른다. 매표소로 가 지폐를 교환하고는 캡슐 커피를 한 잔 뽑고 값을 지불한다. 그저 그곳에 비치된 통에 넣으면 된다. 처음 마셔보는 캡슐 커피의 맛은, 아마도 그곳 분위기 탓이 클 텐데, 지금 기억으로 나쁘지 않았다. 갤러리에서만큼이나 오래 그곳에 머무르며 시간을 음미했다. 볕이 적절히 들어오고 아무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지만 줄곧 이상했다. 왜 사람들은 이 좋은 공간에 발길 한 번 내비치지 않는 걸까. 







무인찻집에서 나오자마자 콜택시를 불렀다. 그의 파노라마 사진은 대체로 오름을 노래하고 있었고 그 노랫소리를 따라 오름에 가야 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가 주로 담아낸 오름, 용눈이는 두모악갤러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013/11/26 헤이리 포레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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