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요즘은 기억나지 않는 것 투성이다. 


작년에, 기껏해야 2년도 안 되었을 시간 동안 많은 건축 관련 책을 읽었다. 그런데 왜 건축에 관심이 생겼는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성북동에 있는 카페 일상으로 장소를 옮겨 시작된다. 카페 일상 사장님이 건축을 전공했다고 했던가. 여튼, 지금은 내부 구조를 조금 변경해 책이 손이 닿기 힘든 상부에 위치해 있지만 예전 일상엔 책장이 벽에, 누구나 손쉽게 책을 꺼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커피를 기다리며 마시며 책을 읽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에서 김수근의 책 두 권을 만나게 된다. <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앞의 것은 후배 건축가들이 그를 추억하며 쓴 글을 모은 것이고, 뒤의 것은 김수근이 쓴 여러 토막의 글들을 묶어낸 것이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의 책을 접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김원의 <행복을 그린 건축가>. 아마도 이 세 권의 책이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건축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후 건축을 전공한 가까운 형(이 형은 건축가의 건축 이전에 글에 매료된 내게 비판적 시각으로 쏘듯 말을 했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그걸 건축으로 구현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물론 그렇게 되기에 너무나도 열악한 우리나라 건축의 실상 - 대부분 건축주로부터 비롯되는 - 에 대한 푸념도 섞여 있었지만)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 받아 읽고, 대부분의 독서의 양상이 그렇듯 그 뒤로는 모든 게 저절로 이루어졌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뭐든 관심이 생기면 서점부터 찾아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그를 확장해 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이 재밌고 흥미로운 건, 늘 곁에 있고 머무는 실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관심이 생긴 건축물을 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어쩌다 좋은 건축을 만나기도 하는 우연성까지 있기에 더욱)

그렇게 알아갈수록, 관심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것의 본질에 대해 천착(이라고 하기에 거창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하게 되는데 이제는 건축 하면 오로지 ‘인문학의 총체’라는 생각만 오롯하다. 

사회 전반에 인문학 광풍이 불 때 저렇게 요란스레 떠들지 말고, 인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책 말고 건축으로 인문학을 시작하면 될 걸 하는 생각도 조용히 해보았다.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문학이 아닌 게 없을 거다. 그런데 내 보기에 건축, 그러니까 사람이 직접 정주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만큼 인문학적 요소가 곳곳에 전방위적으로 쓰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모호하기는 하겠지만, 건축이라는 전제하에)

사흘간 교육을 받으며 건축을 간만에 접했고, 엊그제는 헤이리 답사까지 다녀왔다. 출판도시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헤이리도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는데 이상하게도(사실은 게으르게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답사를 가기 전 내심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 평소보다 늦은 잠을 자고 일어나 운전을 해 파주로 향했다. 길이 단순했기에 내비게이션을 꺼둔 채, 김창완밴드의 씨디를 재생했다. 길은 쾌적했고 날씨도 예보에 비하면 양호했다. 하지만 파주에, 헤이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완전한 겨울임을 실감해야 했다. 아직 답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이라 걸어서 조금 둘러보려 했는데 춥고 발이 시려(나는 왜 발목양말을 신었던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답사. 말은 그럴싸했지만 답사일정으로 소화한 건축물이나 내실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나마 모아갤러리와 예맥홀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예맥홀은 심심한 겉모습과는 달리 지하에 엄청난 공간을 품고 있었다. 바로 공.연.장! 음향시설이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공간 자체는 굉장히 아늑하고 탐스러웠다. 나름 체계를 갖춘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것 같았고.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다시 헤이리 중심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도를 보며 챙겨 볼 몇 개의 건축을 체크해뒀기 때문이다. 우선 김인철이 설계한 ‘마당 안 숲’. 현재 국내 건축가 중에서는 김인철의 건축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특히, 대신동에 있는 ‘김옥길기념관’을 가장 좋아하는데 모모나 필름포럼에 영화를 보러 갈 때면 꼭 그곳에 들러 건물을 보거나 지금은 로드샌드위치로 이름을 달리한 그곳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사 먹기도 한다. 처음 지어졌을 땐 카페였다고 하는데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제법 북적대는 분위기보다 그때가 훨씬 차분하고 나아보인다.

몸을 떨며 발걸음을 빨리 해 찾아 간 ‘마당 안 숲’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외관을 감상해야 했는데 사실 겉모습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산의 경사를 그대로 끼고 있어 건물 안에 들어가 그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민박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하룻밤 묵으면 될 일이긴 하지만.

그 밖에 선유도공원을 훌륭하게 재생한 조성룡과 알바로 시저에게 사사받은 김준성이 설계한 건축물이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한길사 북하우스에 가야 했고, 책을 읽고 사야 했으며, 곧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길이 막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인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출판도시가 국내 유수의 건축가들과 효과적인 협업으로 지금의 문화단지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자극을 받아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나도 할래, 하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게 헤이리라 하고. 사실 출판도시나 헤이리나, 안의 성질만 다르지 입지나 단지를 이루고 이어나가는 전반적 성격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유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출판도시에 있는 한길사 책방도 멋지지만 헤이리의 것은 높디 높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으로 일찍이 유명해졌다. 사진으로 하도 봐온 터라 실제 대했을 때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기보다 나는 언제 이렇게 마음이 두둑해지는 서재를 꾸밀 수 있을까 하는 여전히 멀리 있는 희망만을 툭툭 건드려야 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도 가고, 짧게 글도 쓰고, 정작 책은 읽지 못하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집 세 권을 사고, 그리고 새해 다이어리를 샀다. 미메시스에서 만든 예쁜 초록색으로.

마지막으로 다이어리를 산 건 아마 2005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을 쓰기 시작한 2010년부터는 대부분의 메모를 아이폰으로 대신했고, 구글드라이브와 아이클라우드가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어디서나 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그 사이 사이 손으로 쓰고자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평소에 습관화 되어 있지 않은 펜 사용 또한 갑작스레 하려니 서투르고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무엇보다 잘 쓰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한 달여 앞둔 지금, 다이어리에 생각이 미쳤고 막상 눈앞에 맘에 든 색상과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보자 큰 고민 없이 덜컥 구매를 하게 되었다.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하고자 했든 남겨졌든, 부지런히 기록을 해보자.


오늘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성당이 떠올랐다. 헤이리 답사 때 들은 강의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지만, 롱샹성당은 언제나 건축 답사 1순위 언저리에 있다. 언뜻 (보는 방향에 따라)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앙증맞은, 그래서 만화에 나와도 무방할 듯한 외형은 (실제가 아닌 사진으로 봤을 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않지만, 갖가지 크기로 이루어진 창이 끌어들이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실내의 풍경은 보는 순간 가슴을 멎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를 실제로 보면 정말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건축을 생각할 때면 최후에 단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으로 생각에 마침표를 찍는다. 바로 루이스 칸. 끊임없이 건축의 본질에 닿고자 했던 지독한 근본주의자. 끝없이 공부하며 자신의 건축 철학을 꿋꿋이 밀고 나갔던, 그래서 당대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명성이 말해주는 흘륭한 건축을 남기고, 뉴욕 기차역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루이스 칸, 말이다.



앞으로 내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는 전적으로 루이스 칸의 건축을 실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bon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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