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노란집

오랜만에 카페 일상에 왔다. 


쓰레기를 버리고, 성북동으로 걸어오며 성북동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에, 매형 생일 때 누룽지백숙을 먹으러 오긴 했지만 자동차로 스치듯 지나온 건 성북동에 제대로 온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다 보니, 섭지코지 테이크아웃이라는 스시집이, 원래 성북동에 있는 (한 번 가보고 싶은) 섭지코지의 분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생겼는데 어제 스시 얘길 해서 그런지 더없이 식욕을 자극했고 저녁엔 스시를, 이란 현실에 가까운 생각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같이 살고 있는 누나가 날것을 전혀 먹지 못한다. 다시 걷는다. 재밌고 깔끔한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무명식당’. 순간 나는 이발관의 노래 ‘무명택시’(재작년 연말 공연에 갔을 때 이발관 구린 노래 뽑기에도 등장했던)를 떠올렸다. 불고기 비슷한 걸 파는 거 같던데, 문을 닫았다. 또 걷는다. 주차장 앞에 뭘 만들고 있다. 반가운 제주의 현무암 색이나 길가에 들어서기에 언뜻 보아도 큰 덩치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성북동에 올 적마다 뭔가 새로 만들어지고 들어서고 기존의 것은 자꾸 없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위 뜨고 있는 동네 중 하나라고 했던가. 주말, 밥이라도 먹으러 오면 가득찬 차들로 진저리가 날 때도 있지만 다행히 아직은 삼청동이나 북촌 따위의 번잡함에 비길 만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살고 싶은 동네, 성북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런 내게 그러한 변화, 그러니까 변화 자체는 별로 반갑지가 않다. 


일상의 커피는 정말 훌륭하다. 늘 오늘의 커피만을, 일반 커피집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듯, 마시는데 두 종류의 오늘의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내가 그동안 마셔온 커피의 부족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만큼 일상 커피의 맛은 절대적이다. 요즘 종종 가는 광화문 커피스트의 맛도 나쁘지 않지만, 일상의 맛이 더 순수하고 말끔하다. 이제 날씨도 추워지고, 다시 드립을 시작하기 위해 커피도 사 가야겠다. 


선잠단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멀뚱히 서 있는데, 길상사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북동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길상사와 간송미술관, 일상인데 간송미술관과 일상은 거의 붙어 있는 반면 길상사는 간송미술관의 등 뒤에 있으면서도 바로 넘어오는 길이 없어 돌아가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만 개방하는 간송은 제외하고, 성북동에 오면 일상과 길상사 모두를 들르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가만 걸어오며 생각을 해보니 간송 가을 전시 때 성북동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도 길상사에도 들르지 않았다. 물론 간송 전시를 보기 위해 무려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지치기도 한 탓이겠지만, 그 멋드러진 가을의 길상사를 놓치고 이렇게 멀뚱히 겨울을 맞이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만 하다. 

길상사의 봄, 그러니까 초파일 무렵의 그곳은 조계사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 비슷하게 꾸며져 다소의 화려함과 아기자기함을 자랑한다면 가을의 길상사는 고즈넉함과 쓸쓸함의 결정체다. 눈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단풍이 아닌 산속에 있는 듯한 깊은 맛을 주고 그 속을 걷고 있으면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머리가 맑게 비워진다. 멀리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이미 딴 세상이다. 


지금 일상은 절반이 공사중이다. 그래서 원래 일상의 공간으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좁고, 사람들로, 그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하다. 전형적인 주말 오후의 풍경. 아쉽지만 왜인지 샌드위치는 지금은 안 한다고 한다. 소박한 빵에 두터운 치즈를 넣어주던 샌드위치가 담백하고 좋았는데, 그걸 먹고 싶었는데.  


카프카를 읽다가 집중력과 기다림의 한계에 봉착했다. 답은 하나였다. 예가체프 100g을 사서 일상을 빠져나와 길상사로 향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오후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알맞은 시각이다. 길상사로 오르다가, 길가에 있는 좋아하는 건물, 성북동성당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걷는다. 

역시, 길상사에도 완전한 겨울이 찾아왔다. 땅은 적당히 얼어붙었고 단풍은 갓 물러간 흔적이 역력했다. 길상사에서의 내 동선은 늘 한결같다. 한적한 공간을 걸어, 길상화 공덕비가 있는 곳으로 간다. 누군가 요구르트도 귤도 갖다놓았다. 어, 공덕비 옆에 못 보던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설명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명료하다. 게다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전문이 적혀있다. 크게 공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설명이 알짜배기니 그동안 길상사를 드나들던 사람도,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자야 여사와 백석 시인의 사연, 그리고 법정스님에 의해 길상사가 탄생하게 된 아름다운 배경을 쉬 알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마음이 그윽해져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리고 올해 길상사에 새로이 꾸며진 진영각. 법정스님을 위한,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생전 쓴 책과 유품 들이 그리고 마치 눈앞에 살아 계시며 준엄하게 우리를 꾸짖을 듯한 법정스님의 진영(眞影)이 걸려있다. 절로 모든 게 스르륵 내려지는 차분함이 온몸과 마음을 싸고돈다. 더욱 느려진 발걸음은 이내 드리워진 저녁의 으슥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멀리 남산이 잠시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창 힐링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다. 대체로 유행에 무감각한 편이어서 당시 인기를 끌었던 책 한 권 보지 않았지만, 길상사를 빠져나와 걸으며 왠지 마음이,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위로받은 듯했다. 유독 그랬다.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집>을 읽고 있다. 아직 절반을 채 읽지 않았지만 1부 그들만의 사랑법이 너무 따뜻하고 사랑스러워 그만 책을 덮어야 했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준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단번에 이 아름다운 책을 읽는 건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글을 읽으며 어떤 크고 투박한 손이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러면서 내 마음이 아주 넉넉해지는 듯했다. 부정의 기운이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주위에 많이 선물을 하고 싶은 책이다. 


길상사를 다녀온 마음과 박완서 선생의 <노란집>을 읽은 마음이, 그 마음과 마음이 합쳐져 월요일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긴장으로 휩싸여 있던 나를, 그랬던 나를 조용히 가라앉혀 차분함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 도서반납함에 두 권의 책을 밀어넣고, 버스를 타고 동네에 내려 분식집을 그냥 지나치려다 누나 생각이 나 떡볶이와 튀김을 사서 집으로 올라가는 내 발걸음이 유독 빨라지고 있었다. 


침대에서 뒹굴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 씻고 커피를 내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드립 장비를 하나 하나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수돗물이 아닌 생수를 끓여 차분히 내린 커피는 내가 지금껏 내린 어떤 커피보다 맛이 좋았다. 거품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지속적으로 부글거렸고 마실 때의 온도도 적당했다. 마신 후 입안에 남은 감각도 푸근했다. 정말로 커피가 잘 내려졌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길상사에서의 마음과 <노란집>을 읽은 마음이 조화롭게 만난 결과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감상에 치우친 것일까?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데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3권 3호(1938. 3)

 


bon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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