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글 146건
2014.02.04 엄마
2014.02.03 연휴
2014.01.29 詩는 나의 닻이다
2014.01.19 2014/01/19
2013.12.31 한 편의 영화 (2013) 2
2013.12.31 한 권의 책 (2013)
2013.12.03 길상사, 노란집
2013.12.01 생활의 중심
2013.11.30 건축
2013.11.27 두모악
엄마

다른 이유는 아니고, 샤워할 때 손으로 빨곤 했던 속옷이 별로 깨끗하게 빨리지 않는 것 같아 이제는 잘 안 빠는데 샤워하는 거에 비해 집 세탁기 돌아가는 주기가 늦어 속옷이 한두 개씩 모자라곤 했다. 그래서 엄마랑 시장에 간 김에 속옷을 사러 상점에 들렀는데 내 키를 슬쩍 본 주인 아주머니가 100은 입어야겠네, 하길래 문득 내 사이즈를 생각해 보니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외투처럼 들춰볼 수도 없고. 그런 한편 또 생각을 해 보니, 내가 내 속옷을 사려고 직접 상점에 들러본 기억이 없었다. 늘 엄마가 사 주거나 속옷이 부족한 거 같으면 같이 사는 누나가 마트에 가는 길에 사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확실치 않으니 95도 될 거 같고, 라며 지나가는 투로 얼버무렸더니 95를 먼저 내어 주셨다. 3개입인 세트였는데 하나를 꺼내 사이즈를 보며 집에 있는 속옷의 크기와 상상으로 대조를 해 보았는데 얼핏 될 것도 같아서 그대로 돈을 지불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막상 돌아와서 집에 있는 속옷을 꺼내 보니 죄다 100이었다. 다시 새 속옷 하나를 꺼내 사이즈를 비교해 보니 조금 작긴 했다. 그래서 바꿔야 하나 그냥 입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엄마한테 슬쩍, 속옷도 빨면 줄어드나? 하며 물었더니, 그럴 수 있지, 라길래 그럼 바꿔야겠다고 엄마한테 얘길했다. 그랬더니 오늘 또 장에 나가니까 바꾸면 된다고 쉽게 응수해 줘서 맘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심, 사실은 성격상, 한 번 산 물건을 바꾸는 걸 꽤나 불편해 하는 편이고 더군다나 속옷이다 보니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든 차에 엄마가 바꿔준다고 하니 맘이 편해진 거였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시장에 다녀온 엄마에게 속옷은 바꿨어? 라고 물었더니 그럼, 근데 미안해서 본인 속옷도 만 원어치 샀다고, 아주머니가 그냥 바꿔주더라면서 참 친절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게다가 바꾼 속옷이 BYC라며 더 좋은 거 아니냐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아무 말 안 했지만 정말 이런 마음씨를 지닌 엄마가 너무 좋다.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 나와 삼촌 때문에 서둘러 할머니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데 까만 봉지에 오늘 맞춘 떡과 매형이 좋아하더라며 문어를 담고 버스에서 먹으라며 허겁지겁 귤을 막 던져 넣어주는 엄마가 난 참 좋다. 



연휴

요즘 맛있는 음식 먹기를 무엇보다 좋아하게 된 나는, 연휴 동안 매 끼니마다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새삼 놀라고 있다. 바로 내가 상상으로 찾던 그 맛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부러움으로 외식을 동경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돈을 지불하고 사 먹는 음식은 집에서 먹는 평범한 밥과는 으레 다를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까닭이다. 마치 어릴 적 어른이 '완벽'해 보였던 것처럼. 

나와 다른 세계, 다른 영역에 대해 습관적으로 부여해 왔던 일종의 거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나오고, 사회적으로 어른이 된 이후로도 늘 그 거리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간격을 인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막상 사회의 면면을 하나둘 직시하게 되는 나이가 되자 그러한 민낯들이 때론 근사하면서도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가까운 지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는 다른 영역으로 너무나 쉽게 드나드는 모습을 볼 때면 늘 신기해 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무엇보다 이는 내가 '확신'을 멀리해 왔던 심리적 습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인생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인지도. 가령 어느 맛있는 식당에 가더라도 '정말, 너무' 맛있다는 표현은 잘 못 쓰곤 했다. 저 사람 '진짜' 진국이네, 저 영화 '대박'이다...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 사람을 대할 때나 사소한 사건을 겪을 때, 받아들이는 감정의 경계가 제법 쉽게 무너짐을 느끼곤 한다. 그로 인해 내게 주어진 삶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도 쉽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며 반대로 내게 아주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엄마가 해 주는 밥이 이토록 황홀한 맛이라니. 


연휴 내내 엄마가 귀신처럼 뚝딱 내놓는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이런 엄마의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자주 가질 수 있다면.. 



詩는 나의 닻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1968. 4, 김수영>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처음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것이 시인 줄로만 알고 제목이 뭐였더라 - 그러면서도 구글링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전집을 뒤져 찾으려 했고 실제로 찾다가 못 찾아 결국 구글링한 뒤 알게 되었다 - 하며 종일 크게 다급하지 않은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시에 시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하루이기도 했다.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전집, 산문과 시로 구성된 두 권의 책 표지는 시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POET Soo Yung KIM 詩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씌여 있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샀을 때, 그래서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닻'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았다. 저 문장이 좋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어 자체가 주는 특수한 느낌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정도로 내 맘을 사로잡는다. 

흡연자들이 새해가 되면 담배를 끊어야지 하는 것처럼 나는 특별할 것 없어, 하며 짐짓 말하면서도 구정 무렵이 되어 음력으로도 분명하게 해가 바뀜이 온몸으로 전해지면, 뭐든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글을 쓰고 싶다는 뻔하면서도 새로운 앞선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은 늘 막연하고 거대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경이로울 정도로 오늘은 사무실에서도 왠지 모를 의욕이 앞서고 다르게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거란 들뜬 기대가 머리와 가슴에 진동하며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이 느낌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정도의 세기였고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팔팔할 때, 모든 게 보다 분명하고 눅눅하지 않을 때, 그래서 느낌을 가능한 쾌적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의지가 선명한 지금 이 순간을 단단한 줄에 매어 붙들어 두고 싶은 것이다. 마치 '닻'이 배를 그렇게 하듯이. 


2014/01/19

시간이 지나가는 건 언제나 공평하고 변함이 없지만 늘 날짜를 입력하며 시간을 한탄하게 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예정대로 되지 않는 독서 때문인 경우가 태반이다. 아직 백범을 다 읽지 못했고 시작하려던 카뮈는 손도 못 대고 있는 중에 어제 영풍문고에 아이엘츠 책을 보러 들렀다가 드니 디드로의 책과 하이데거를 다룬, 녹색평론에 소개 되었던 그린비 인물시리즈 책을 샀다. 둘 모두 초판이다. 한참 술에 취해 있었던 종로의 어느 술집에서 잠에서 깬 내게 상엽과 그의 아내는 책이 뭔지 봤다며, 제목부터 어렵고 무거워 보인다며 나를 제3세계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나는 진정으로 문학을 나누고 싶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참 많다. 하지만 문학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막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셈이다. 


한 편의 영화 (2013)

1.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011), 알랭 레네

2. 홀리 모터스 (2012), 레오스 카락스 

3. 레볼루셔너리 로드 (2008), 샘 멘데스 

4. 레볼루셔너리 로드 (2008), 샘 멘데스 

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 토마스 알프레드슨 

6. 아르마딜로 (2010), 야누스 메츠 

7. 아메리칸 뷰티 (1999), 샘 멘데스 

8. 굿 윌 헌팅 (1997), 구스 반 산트 

9. 플래시 댄스 (1983), 애드리안 라인 

10. 요들을 노래하는 농부 (2011), 베른하르트 베버&마틴 쉴트 

11.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우디 앨런 

12. 내일을 위한 길 (1937), 레오 맥캐리 

13.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011), 알랭 레네 

14. 디 아워스 The Hours (2001), 스티븐 달드리 

15. 레볼루셔너리 로드 (2008), 샘 멘데스 

16. 위대한 레보스키 (1998), 코엔 형제 

17. 라이프 오프 파이 (2012), 이안 

18. 디 아워스 The Hours (2001), 스티븐 달드리 

19. 비포 선라이즈 (1995), 리처드 링클레이터 

20. 레 미제라블 (2012), 톰 후퍼 

21.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이누도 잇신 

2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2), 홍상수 

23. 더 리더 The Reader (2008), 스티븐 달드리 

24.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빔 벤더스 

25. 말하는 건축가 (2012), 정재은 

26. 비러브드 (2012), 크리스토프 오노레 

27.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데이비드 린치 

28. 지슬 (2012), 오멸 

29. 굿바이 레닌 (2004), 볼프강 베커 

30.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 쿠엔틴 타란티노 

31. 필름 소셜리즘 (2010), 장 뤽 고다르 

32. 에브리데이 (2012), 마이클 윈터버텀 

33. 마스터 (2012), 폴 토마스 앤더슨 

34. 오르탕스를 찾아서 (2012), 파스칼 보니체르 

35. 그리고 다섯 번째 마부는 두렵다 (1965), 즈비넥 브리니흐 

36. 폭스파이어 (2012), 로랑 캉테 

37. 카프카는 누구인가 (2006), 리하르트 딘도 

38. 아자가사미의 말 (2011), 수신드란 

39. 러스트 앤 본 (2012), 자크 오디아르 

40. 테이크 쉘터 (2011), 제프 니콜스 

41. 안나 카레니나 (2012), 조 라이트 

42.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 홍상수 

43.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2011), 고레에다 히로카즈 

44. 머니볼 (2011), 베넷 밀러 

45. 위대한 개츠비 (2013), 비즈 루어만 

46. 비포 미드나잇 (2013), 리처드 링클레이터 

47. 춤추는 숲 (2013), 강석필 

48. 빅 픽쳐 (2010), 에릭 라티고 

49. 인 더 하우스 (2012), 프랑수아 오종 

50. 타인의 취향 (2000), 아녜스 자우이 

51.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2011) 뱅상 파로노, 마르잔 사트라피 

52. 더 리더 (2008), 스티븐 달드리 

53. 설국열차 (2013), 봉준호 

54. 일대종사 (2013), 왕가위 

55. 우리 선희 (2013), 홍상수 

56. 사랑에 빠진 것처럼 (2012),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57. 쇼를 사랑한 남자 (2013), 스티븐 소더버그 

58. 이웃들 (1920), 버스터 키튼, 에드워드 클라인 

59. 피고 13 (1920), 버스터 키튼, 에드워드 클라인 

60. 그래비티 (2013), 알폰소 쿠아론 

61. 파고 (1996), 코엔 형제 

62. 마지막 4중주 (2012), 야론 질버만 

63. 사랑에 빠진 것처럼 (2012),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64. 해피투게더 (1997), 왕가위 

65.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2013), 코엔 형제 

66. 영 앤 뷰티풀 (2013), 프랑수아 오종 

67.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2013), 아쉬가르 파라디 

68. 잠 못 드는 밤 (2012), 장건재 



한 권의 책 (2013)

1.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김남주, 문학동네) 

3. 한번은, (빔 벤더스, 이) 

4.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김병종, 랜덤하우스) 

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6. 고독의 권유 (장석주, 다산책방) 

7.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웅진) 

8. 고령화 가족 (천명관, 문학동네) 

9.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마누엘 푸익, 송병선, 현대문학) 

10. 그 여자네 집 (박완서, 문학동네) 

11.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12. 카르마의 바다 (문정희, 문예중앙) 

13.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창비)

14.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문학동네) 

15. 꿈의 페달을 밟고 (최영미, 창비) 

16.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오에 겐자부로, 박유하 옮김, 문학동네) 

17.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 눌와) 

18. 돼지들에게 (최영미, 실천문학사) 

19.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신성림 옮김, 예담) 

20.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최영미, 문학동네) 

21. 삶은.. 여행 (이상은, 북노마드) 

22. 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 (김진애, 다산북스) 

23.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조이한, 현암사) 

24.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 컬처그라퍼) 

25. 기억의 집 (최승자) 

26.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김남주 옮김, 민음사) 

27. 녹색평론 128 

28.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폴 담) 

29. 나목 (박완서, 세계사) 

30.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민서출판) 

31. 첼리스트 카잘스 (엘버트 칸, 김병화 옮김, 한길사)

32. 녹색평론 129 

33.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34. 카뮈를 추억하며 (장 그르니에, 민음사) 

35. 헌법의 풍경 (김두식, 교양인) 

36.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전혜린, 문예출판사) 

37.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문학동네) 

38. 에브리맨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39. 샬롬과 쌀람 (유재현, 창비) 

40.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 (에릭 호퍼, 정지호 옮김, 동녘) 

41.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김남주, 민음사) 

42. 시대의 우울 (최영미, 창비) 

43. 우리 얼마나 함께 (마종기, 달) 

44.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아포리아) 

45.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창비) 

46.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마종기, 문학과지성사) 

47. 녹색평론 129 

48. 질문의 책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문학동네) 

49. 주막에서 (천상병, 민음사) 

50. 어느 시인의 죽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안정효 옮김, 까치) 

51. 집을, 순례하다 (나카무라 유시후미, 황용운 김종하 옮김, 사이)

52. 폴 고갱 (인고 발터, 김주원 옮김, 마로니에북스) 

53. 달려라, 아비 (김애란, 창비) 

54.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옮김, 민음사)

55. 절망은 나의 힘 (프란츠 카프카, 가시라기 히로키 엮음, 박승애 옮김, 한즈미디어) 

56.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진선주 옮김, 문학동네) 

57. 렘브란트 (마리에트 베스테르만, 강주헌, 한길아트) 

58. 네덜란드 (주경철, 산처럼) 

59.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문학동네) 

60. 세잔느의 회상 (에밀 베르나르, 박종탁 옮김, 열화당) 

61.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난) 

62.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창비) 

63. 모든 게 노래 (김중혁, 마음산책) 

64. 침이 고인다 (김애란, 문학동네) 

65.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김남주 옮김, 민음사) 

66. 카프카 단편집 (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지만지) 

67. 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문학과지성사) 

68.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박재삼 옮김, 다빈치)

69. 고래 (천명관, 문학동네) 

70.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문학동네) 

71. 미각의 제국 (황교익, 따비) 

72. 트랙과 들판의 별 (황병승, 문학과지성사) 

73. 녹색평론 131 

74.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문학동네) 

75. 숙녀 발랑기 (이주윤, 퍼플카우) 

76. 도시의 기억 (고종석, 개마고원) 

77. 삼십 살 (앙꼬, 사계절) 

78. 녹색평론 133 

79.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80. 나쁜 친구 (앙꼬, 창비) 

81. 소송 (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옮김, 문학동네) 

82. 노란집 (박완서, 열림원) 

8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스완네 집 쪽으로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8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스완네 집 쪽으로2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85.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 주은정 옮김, 디자인하우스) 

86. 녹색평론 132 


길상사, 노란집

오랜만에 카페 일상에 왔다. 


쓰레기를 버리고, 성북동으로 걸어오며 성북동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에, 매형 생일 때 누룽지백숙을 먹으러 오긴 했지만 자동차로 스치듯 지나온 건 성북동에 제대로 온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다 보니, 섭지코지 테이크아웃이라는 스시집이, 원래 성북동에 있는 (한 번 가보고 싶은) 섭지코지의 분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생겼는데 어제 스시 얘길 해서 그런지 더없이 식욕을 자극했고 저녁엔 스시를, 이란 현실에 가까운 생각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같이 살고 있는 누나가 날것을 전혀 먹지 못한다. 다시 걷는다. 재밌고 깔끔한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무명식당’. 순간 나는 이발관의 노래 ‘무명택시’(재작년 연말 공연에 갔을 때 이발관 구린 노래 뽑기에도 등장했던)를 떠올렸다. 불고기 비슷한 걸 파는 거 같던데, 문을 닫았다. 또 걷는다. 주차장 앞에 뭘 만들고 있다. 반가운 제주의 현무암 색이나 길가에 들어서기에 언뜻 보아도 큰 덩치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성북동에 올 적마다 뭔가 새로 만들어지고 들어서고 기존의 것은 자꾸 없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위 뜨고 있는 동네 중 하나라고 했던가. 주말, 밥이라도 먹으러 오면 가득찬 차들로 진저리가 날 때도 있지만 다행히 아직은 삼청동이나 북촌 따위의 번잡함에 비길 만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살고 싶은 동네, 성북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그런 내게 그러한 변화, 그러니까 변화 자체는 별로 반갑지가 않다. 


일상의 커피는 정말 훌륭하다. 늘 오늘의 커피만을, 일반 커피집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듯, 마시는데 두 종류의 오늘의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내가 그동안 마셔온 커피의 부족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만큼 일상 커피의 맛은 절대적이다. 요즘 종종 가는 광화문 커피스트의 맛도 나쁘지 않지만, 일상의 맛이 더 순수하고 말끔하다. 이제 날씨도 추워지고, 다시 드립을 시작하기 위해 커피도 사 가야겠다. 


선잠단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멀뚱히 서 있는데, 길상사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북동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길상사와 간송미술관, 일상인데 간송미술관과 일상은 거의 붙어 있는 반면 길상사는 간송미술관의 등 뒤에 있으면서도 바로 넘어오는 길이 없어 돌아가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만 개방하는 간송은 제외하고, 성북동에 오면 일상과 길상사 모두를 들르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가만 걸어오며 생각을 해보니 간송 가을 전시 때 성북동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도 길상사에도 들르지 않았다. 물론 간송 전시를 보기 위해 무려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지치기도 한 탓이겠지만, 그 멋드러진 가을의 길상사를 놓치고 이렇게 멀뚱히 겨울을 맞이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만 하다. 

길상사의 봄, 그러니까 초파일 무렵의 그곳은 조계사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 비슷하게 꾸며져 다소의 화려함과 아기자기함을 자랑한다면 가을의 길상사는 고즈넉함과 쓸쓸함의 결정체다. 눈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단풍이 아닌 산속에 있는 듯한 깊은 맛을 주고 그 속을 걷고 있으면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머리가 맑게 비워진다. 멀리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이미 딴 세상이다. 


지금 일상은 절반이 공사중이다. 그래서 원래 일상의 공간으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좁고, 사람들로, 그들의 대화소리로 가득하다. 전형적인 주말 오후의 풍경. 아쉽지만 왜인지 샌드위치는 지금은 안 한다고 한다. 소박한 빵에 두터운 치즈를 넣어주던 샌드위치가 담백하고 좋았는데, 그걸 먹고 싶었는데.  


카프카를 읽다가 집중력과 기다림의 한계에 봉착했다. 답은 하나였다. 예가체프 100g을 사서 일상을 빠져나와 길상사로 향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오후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알맞은 시각이다. 길상사로 오르다가, 길가에 있는 좋아하는 건물, 성북동성당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걷는다. 

역시, 길상사에도 완전한 겨울이 찾아왔다. 땅은 적당히 얼어붙었고 단풍은 갓 물러간 흔적이 역력했다. 길상사에서의 내 동선은 늘 한결같다. 한적한 공간을 걸어, 길상화 공덕비가 있는 곳으로 간다. 누군가 요구르트도 귤도 갖다놓았다. 어, 공덕비 옆에 못 보던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설명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명료하다. 게다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전문이 적혀있다. 크게 공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설명이 알짜배기니 그동안 길상사를 드나들던 사람도,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자야 여사와 백석 시인의 사연, 그리고 법정스님에 의해 길상사가 탄생하게 된 아름다운 배경을 쉬 알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마음이 그윽해져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리고 올해 길상사에 새로이 꾸며진 진영각. 법정스님을 위한,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생전 쓴 책과 유품 들이 그리고 마치 눈앞에 살아 계시며 준엄하게 우리를 꾸짖을 듯한 법정스님의 진영(眞影)이 걸려있다. 절로 모든 게 스르륵 내려지는 차분함이 온몸과 마음을 싸고돈다. 더욱 느려진 발걸음은 이내 드리워진 저녁의 으슥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멀리 남산이 잠시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창 힐링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다. 대체로 유행에 무감각한 편이어서 당시 인기를 끌었던 책 한 권 보지 않았지만, 길상사를 빠져나와 걸으며 왠지 마음이,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위로받은 듯했다. 유독 그랬다.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집>을 읽고 있다. 아직 절반을 채 읽지 않았지만 1부 그들만의 사랑법이 너무 따뜻하고 사랑스러워 그만 책을 덮어야 했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준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단번에 이 아름다운 책을 읽는 건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글을 읽으며 어떤 크고 투박한 손이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러면서 내 마음이 아주 넉넉해지는 듯했다. 부정의 기운이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주위에 많이 선물을 하고 싶은 책이다. 


길상사를 다녀온 마음과 박완서 선생의 <노란집>을 읽은 마음이, 그 마음과 마음이 합쳐져 월요일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긴장으로 휩싸여 있던 나를, 그랬던 나를 조용히 가라앉혀 차분함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안국역에서 정독도서관 도서반납함에 두 권의 책을 밀어넣고, 버스를 타고 동네에 내려 분식집을 그냥 지나치려다 누나 생각이 나 떡볶이와 튀김을 사서 집으로 올라가는 내 발걸음이 유독 빨라지고 있었다. 


침대에서 뒹굴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 씻고 커피를 내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드립 장비를 하나 하나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수돗물이 아닌 생수를 끓여 차분히 내린 커피는 내가 지금껏 내린 어떤 커피보다 맛이 좋았다. 거품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지속적으로 부글거렸고 마실 때의 온도도 적당했다. 마신 후 입안에 남은 감각도 푸근했다. 정말로 커피가 잘 내려졌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길상사에서의 마음과 <노란집>을 읽은 마음이 조화롭게 만난 결과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감상에 치우친 것일까?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데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3권 3호(1938. 3)

 


생활의 중심

지난 주말, 끝없이 뻗어간 대화는 특정한 주제라고 할 만한 건 딱히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문화로 집약되었다. 문학, 영화, 미술, 삶(더 정확히는 살 곳)..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쏟살같이 지나갔는데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틈 없이 가득 채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얘기들이란 대체로 희망에 가까운 동시에 지금이었으며 앞으로의 불특정한, 그렇지만 반드시 만들어질 (혹 만들어 나아갈)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에 살며 나는, 닥치는 대로 집어먹는 욕심 많은 아이처럼 문화를 접수했다. 영화, 전시, 공연을 비롯해 옛 서울의 흔적을 시간 나는 대로 더듬으며 내가 서울에 살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다. 행여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나 감독의 특별전 같은 걸 놓치기라도 하면 짙은 아쉬움에 더 자주 웹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사라져 갔다. 인지하면서도 멀어져가는 나를 차마 붙잡지 못한 건, 현재를 회피하려는 가장 손 쉬운 선택이었다. 나에겐 접수창구만이 무수히 존재했고, 정작 접수된 수많은 거리들을 사소한 하나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그건 내가 가장 손쉽게 외면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접수창구에서의 시간만으로도 나는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둘, 채워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허무임을 알아챘을 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짐짓 모른 체하다 이제야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을 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나는 없었다. 그저 탐욕스러운 아이, 허겁지겁 먹어치울 줄만 아는 수동적인 아이만 남아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있다고 할 수 없는 나였다. 왜냐하면 철저히 외면해 왔지만 내가 원하는 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하며 사귄 후 내적 공감대가 크게 형성된 y가 곁에서 꾸준히 자극제가 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삶이 이대로 흘러가버리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주말, y와 s의 만남에서 s가 내게 말했다. 생활의 중심에 그것을 가져다 놓으라고. y처럼 그게 생활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이었기에 내 치명적인 결함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s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생활의 중심을 처방전으로 내렸다. 과연 약사다웠다. 그 말이, 하루 이틀 지나도록 계속 머릴 맴돈다. 조심스럽게 내 등을 떠미는 그 처방에,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그것에 마음이 크게 안정되고 있음을 느낀다. 생활의 중심, 그래, 그 많은 접수창구는 모두 허위다. 허위는 줄이고 중심을 견고히 하자.


2013/11/26 헤이리 포레스트에서 



건축

요즘은 기억나지 않는 것 투성이다. 


작년에, 기껏해야 2년도 안 되었을 시간 동안 많은 건축 관련 책을 읽었다. 그런데 왜 건축에 관심이 생겼는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성북동에 있는 카페 일상으로 장소를 옮겨 시작된다. 카페 일상 사장님이 건축을 전공했다고 했던가. 여튼, 지금은 내부 구조를 조금 변경해 책이 손이 닿기 힘든 상부에 위치해 있지만 예전 일상엔 책장이 벽에, 누구나 손쉽게 책을 꺼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커피를 기다리며 마시며 책을 읽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곳에서 김수근의 책 두 권을 만나게 된다. <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앞의 것은 후배 건축가들이 그를 추억하며 쓴 글을 모은 것이고, 뒤의 것은 김수근이 쓴 여러 토막의 글들을 묶어낸 것이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의 책을 접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김원의 <행복을 그린 건축가>. 아마도 이 세 권의 책이 나를 (간접적으로나마) 건축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후 건축을 전공한 가까운 형(이 형은 건축가의 건축 이전에 글에 매료된 내게 비판적 시각으로 쏘듯 말을 했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그걸 건축으로 구현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물론 그렇게 되기에 너무나도 열악한 우리나라 건축의 실상 - 대부분 건축주로부터 비롯되는 - 에 대한 푸념도 섞여 있었지만)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 받아 읽고, 대부분의 독서의 양상이 그렇듯 그 뒤로는 모든 게 저절로 이루어졌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뭐든 관심이 생기면 서점부터 찾아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그를 확장해 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이 재밌고 흥미로운 건, 늘 곁에 있고 머무는 실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관심이 생긴 건축물을 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어쩌다 좋은 건축을 만나기도 하는 우연성까지 있기에 더욱)

그렇게 알아갈수록, 관심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것의 본질에 대해 천착(이라고 하기에 거창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하게 되는데 이제는 건축 하면 오로지 ‘인문학의 총체’라는 생각만 오롯하다. 

사회 전반에 인문학 광풍이 불 때 저렇게 요란스레 떠들지 말고, 인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책 말고 건축으로 인문학을 시작하면 될 걸 하는 생각도 조용히 해보았다.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문학이 아닌 게 없을 거다. 그런데 내 보기에 건축, 그러니까 사람이 직접 정주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만큼 인문학적 요소가 곳곳에 전방위적으로 쓰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모호하기는 하겠지만, 건축이라는 전제하에)

사흘간 교육을 받으며 건축을 간만에 접했고, 엊그제는 헤이리 답사까지 다녀왔다. 출판도시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헤이리도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는데 이상하게도(사실은 게으르게도) 여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답사를 가기 전 내심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 평소보다 늦은 잠을 자고 일어나 운전을 해 파주로 향했다. 길이 단순했기에 내비게이션을 꺼둔 채, 김창완밴드의 씨디를 재생했다. 길은 쾌적했고 날씨도 예보에 비하면 양호했다. 하지만 파주에, 헤이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은 완전한 겨울임을 실감해야 했다. 아직 답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이라 걸어서 조금 둘러보려 했는데 춥고 발이 시려(나는 왜 발목양말을 신었던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답사. 말은 그럴싸했지만 답사일정으로 소화한 건축물이나 내실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나마 모아갤러리와 예맥홀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예맥홀은 심심한 겉모습과는 달리 지하에 엄청난 공간을 품고 있었다. 바로 공.연.장! 음향시설이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공간 자체는 굉장히 아늑하고 탐스러웠다. 나름 체계를 갖춘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것 같았고.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다시 헤이리 중심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도를 보며 챙겨 볼 몇 개의 건축을 체크해뒀기 때문이다. 우선 김인철이 설계한 ‘마당 안 숲’. 현재 국내 건축가 중에서는 김인철의 건축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특히, 대신동에 있는 ‘김옥길기념관’을 가장 좋아하는데 모모나 필름포럼에 영화를 보러 갈 때면 꼭 그곳에 들러 건물을 보거나 지금은 로드샌드위치로 이름을 달리한 그곳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사 먹기도 한다. 처음 지어졌을 땐 카페였다고 하는데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제법 북적대는 분위기보다 그때가 훨씬 차분하고 나아보인다.

몸을 떨며 발걸음을 빨리 해 찾아 간 ‘마당 안 숲’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외관을 감상해야 했는데 사실 겉모습만으로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산의 경사를 그대로 끼고 있어 건물 안에 들어가 그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민박으로 운영을 한다고 하니 하룻밤 묵으면 될 일이긴 하지만.

그 밖에 선유도공원을 훌륭하게 재생한 조성룡과 알바로 시저에게 사사받은 김준성이 설계한 건축물이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한길사 북하우스에 가야 했고, 책을 읽고 사야 했으며, 곧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길이 막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인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출판도시가 국내 유수의 건축가들과 효과적인 협업으로 지금의 문화단지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자극을 받아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나도 할래, 하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게 헤이리라 하고. 사실 출판도시나 헤이리나, 안의 성질만 다르지 입지나 단지를 이루고 이어나가는 전반적 성격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유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출판도시에 있는 한길사 책방도 멋지지만 헤이리의 것은 높디 높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으로 일찍이 유명해졌다. 사진으로 하도 봐온 터라 실제 대했을 때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기보다 나는 언제 이렇게 마음이 두둑해지는 서재를 꾸밀 수 있을까 하는 여전히 멀리 있는 희망만을 툭툭 건드려야 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도 가고, 짧게 글도 쓰고, 정작 책은 읽지 못하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집 세 권을 사고, 그리고 새해 다이어리를 샀다. 미메시스에서 만든 예쁜 초록색으로.

마지막으로 다이어리를 산 건 아마 2005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폰을 쓰기 시작한 2010년부터는 대부분의 메모를 아이폰으로 대신했고, 구글드라이브와 아이클라우드가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어디서나 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그 사이 사이 손으로 쓰고자 수차례 시도를 했지만 평소에 습관화 되어 있지 않은 펜 사용 또한 갑작스레 하려니 서투르고 글씨는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무엇보다 잘 쓰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한 달여 앞둔 지금, 다이어리에 생각이 미쳤고 막상 눈앞에 맘에 든 색상과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보자 큰 고민 없이 덜컥 구매를 하게 되었다.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하고자 했든 남겨졌든, 부지런히 기록을 해보자.


오늘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성당이 떠올랐다. 헤이리 답사 때 들은 강의에서 소개가 되기도 했지만, 롱샹성당은 언제나 건축 답사 1순위 언저리에 있다. 언뜻 (보는 방향에 따라)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앙증맞은, 그래서 만화에 나와도 무방할 듯한 외형은 (실제가 아닌 사진으로 봤을 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않지만, 갖가지 크기로 이루어진 창이 끌어들이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실내의 풍경은 보는 순간 가슴을 멎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를 실제로 보면 정말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건축을 생각할 때면 최후에 단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으로 생각에 마침표를 찍는다. 바로 루이스 칸. 끊임없이 건축의 본질에 닿고자 했던 지독한 근본주의자. 끝없이 공부하며 자신의 건축 철학을 꿋꿋이 밀고 나갔던, 그래서 당대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명성이 말해주는 흘륭한 건축을 남기고, 뉴욕 기차역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루이스 칸, 말이다.



앞으로 내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는 전적으로 루이스 칸의 건축을 실제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두모악

떻게 김영갑을 알게 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중산간 제주를 또렷히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동시에 그의 미련스러울 정도로 꿋꿋한 삶을, 비록 그 결과야 어쨌든,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는 이십 대에 처음 만난 제주에 홀딱 반해 일 년에 몇 차례를 오가며 사진을 찍고 그걸로 부족해 아예 제주에 정착해 남은 삶을 오로지 제주의, 특히 중산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데 평생을 바친다. 그리고 루게릭병에 걸려 몸이 온전치 않음에도 남은 힘과 열정 모두를 바쳐 이룩해 남겨놓은 게 바로 두모악갤러리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 중 하나다) 

두모악갤러리에 가기로 한 아침, 날씨가 기가막히게 좋았다. 서귀포 숙소에서 나서니 제주에 머문 지난 사흘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한라산이 우뚝 눈앞에 솟아 있었다. 마치 얼른 오라고 손짓하듯.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김영갑, 그를 만나러 가야했다. 

서귀포에서 잡아 탄 900번 버스는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편리는 있지만 온갖 동네를 모두 거쳐가 대단한 시간이 걸려서야 나를 두모악갤러리 앞에 내려주었다. 




분교를 개조해 만든 갤러리 앞마당엔 가득 정원이 들어서 있었다. 그 불편한 몸을 끌고 이 모든 걸 했다고 생각하니, 경외감이 들면서도 마음이 짠해졌다. 도착했으니 서두를 건 없었다. 시간은 최대한 넉넉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가 가방을 선반에 놓고서 매표를 하고 갤러리로 들어섰다. 매표를 하니 그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된 엽서를 한 장 준다. (처음에 받은 건 노을 사진이었는데 나중에 오름 사진으로 교환했다) 학교 건물이기에 가운데 입구로 들어서면 전시 공간은 좌우 둘로 나뉜다. 좌우 공간 모두에 사진이 있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우측엔 제주방송에서 촬영한 그의 생전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좌측엔 그가 생전 머물렀던 작업 공간이 있다. 

좌우 공간을 느릿하게 걸으며 그의 파노라마 사진을 보면, 볼수록 제주는 왜 파노라마에 담아야 하는지 쉽게 수긍하게 된다. 보통의 사진, 그러니까 사람들이 열광하곤 하는 사진은 대체로 분명한 어떤 느낌에 그 지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김영갑의 사진은 오로지 날것 그대로의 제주가 온전히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바람. 제주의 바람이. 계절을 사진에 표현하는 건 계절마다 가진 특색이 분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어떤 감동을 주기보다 계절 그 자체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진은 드물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엔 온전한 제주가 그대로 ‘있다’. 그뿐이다. 그는 평생 제주에 머무르며 그렇게 제주를 파노라마에 담아냈다. 

건물 뒷편에는 무인찻집이 있었다. 갤러리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곳은, 말 그대로 무인無人, 커피와 차를 마시기 위한 모든 게 구비되어 있고 한켠에는 클래식FM이 적당한 볼륨으로 흐른다. 매표소로 가 지폐를 교환하고는 캡슐 커피를 한 잔 뽑고 값을 지불한다. 그저 그곳에 비치된 통에 넣으면 된다. 처음 마셔보는 캡슐 커피의 맛은, 아마도 그곳 분위기 탓이 클 텐데, 지금 기억으로 나쁘지 않았다. 갤러리에서만큼이나 오래 그곳에 머무르며 시간을 음미했다. 볕이 적절히 들어오고 아무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지만 줄곧 이상했다. 왜 사람들은 이 좋은 공간에 발길 한 번 내비치지 않는 걸까. 







무인찻집에서 나오자마자 콜택시를 불렀다. 그의 파노라마 사진은 대체로 오름을 노래하고 있었고 그 노랫소리를 따라 오름에 가야 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가 주로 담아낸 오름, 용눈이는 두모악갤러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013/11/26 헤이리 포레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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