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글 146건
2013.11.17 추사
2013.11.17 평화책방
2013.11.06 끌로드 모네
2013.11.06 너븐숭이
2013.10.29 Edition of Contemporary Music
2013.10.18 제주
2013.10.12 스테이 위드 미
2013.10.03 라떼
2013.09.18 맥주
2013.09.18 모든 게 노래
추사

중산간에서 내려와 제주터미널에서 750번 버스에 올랐다. 약간 출출해 터미널 매점에서 산 다이제스티브를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기사분과 어느 부자(父子)와 나눠 먹으며 추사(秋史)를 떠올렸다. 

친절한 버스는 추사유배지 바로 앞에 정차를 했고 버스에서 내리니 퉁명스러운 표정을 한 추사관이 떡하니 서 있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려고 하니 아저씨께서 내 손에 들린 답사기를 보며 말을 건넨다. “그 책 많이들 보네요.”, “네, 아무래도”, 로 시작된 대화는 왜 혼자 왔느냐, 결혼은 해야 할 거 아니냐에서부터 내 직업, 사는 곳까지 끊일 줄 몰라 애써 몸으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은 제스처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간섭이라기보다는 친근함이라 할 수 있는 친절을 좋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게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이라고도 생각을 하고. 

추사관은 지하로부터 시작된다. 그저 건축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도록이 보이길래 먼저 구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추사의 흔적을 더듬는다. 원본보다는 탁본 위주의 전시지만 꼼꼼히 보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정도의 알찬 내용들이다. 전시 흐름의 끝엔 1층으로 곧장 올라서는 계단이 뻗어있는데 거길 따라 1층으로 올라서면 탁트인 공간에 볕이 골고루 퍼져 들어오며 그 가운데 임옥상이 만든 추사 흉상이 있다. 추사관의 백미다. 








추사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흐름을 따라 건물을 빠져나오면 자연스레 복원된 추사 유배지로 연결이 된다. 대부분의 생가들이 그렇듯 나는 이곳에서도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지만 유배지 한쪽 구석에 앉아 답사기의 추사 파트를 읽으며 당시를 상상해보려 했다. 이곳에서 그는 초의선사와 우정을 나누고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다지.. 


유배지 인근으로도 주변의 유적들을 연결하는 돌레길 비슷한 게 조성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미련없이 돌아섰다. 이제 서귀포로 가야 했다. 일주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는 제주만의 바람이, 날씨와 무관한 그것이 쉴 새 없이 불어댔다. 이래서 제주에서는 꼭 제주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평화책방

우선 강정으로 가자, 어두워지기 전에 


서귀포에서 숙소를 잡고 이중섭거리를 어슬렁거리다 강정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말끔하고 다소 과하게 정비한 듯한 이중섭거리에 오래 머무르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 달리지 않아 버스에서 내리니 거대한 공사가림막이 눈에 띄었다. 지도를 살피고 마을을 향해 걸었다.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공사가림막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걸으면, 저기서 들려오는 불쾌한 공사 소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으면 될 일이었다. 

포구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노을만 남았다. 콘크리트로 된 둑 언저리에서 걸어오며 봤던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떠올렸다. 금세 지우고 또 떠올리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하다 책방으로 가자고, 머리를 비우고 몸을 재촉했다. 







평화책방은 원형의 공간에 빙 둘러져 책장이 짜여져 있고, 좌식의 원형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있는 아늑하고 소박한 공간이다. 책들도 출판사나 작가, 시민들로부터 기증 받은 것들이라는데 다채롭고 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제주&강정 코너엔 제주에 관련된 책들만이 꽂혀 있었는데 제주에 있는 ‘각’이라는 출판사에서 제주의 문화, 정체성 등에 대한 책들을 꾸준히 펴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책방 주인장이 설명하길 제주는 섬이 생긴 과정을 비롯해 지형이나 지물, 환경, 날씨, 그로 인해 비롯된 문화가 뭍과는 많이 달라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제주의 그러한 정체성과 그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의식 있는 분들이 많다는 반증이고 이는 굉장히 다행인 일이다, 라고 했다. 

또 내가 제주에서 토박이들의 사투리를 듣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며 요즘 어린 아이들이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냐 물으니 그렇지 않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 분이 인식하고 있는 수준은 심각했다. 특히 유네스코에서도 사라질 위기에 있는 방언으로 언급이 됐다며 교육에서도 표준어만 강요를 하니 문제라고 했다. 나 역시 이에 적극 공감하고 아쉬워했다.  


잠시 책장 정리하는 일을 도우며 나눈 이 같은 대화가 그곳의 편안한 음악과 함께 머무는 데 일조를 했다. 진작 커피를 다 마시고 댕유지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일에 방해가 될까 시키지는 않고 다음을 기약했다. 

나오며, 만 원을 지불하고 잔돈은 이곳에 기부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아이들을 위한 차값으로 달아둔다고 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삼천 원인 차값이 아이들에겐 비싸니 기록해 두었다가 아이들이 차를 마실 수 있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평화책방에 간 바로 전날, 강정마을에는 서울에서 컨테이너에 실어 보낸 책이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책방에 갔을 때 그곳엔 그 책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제주에 온 건축 일하시는 분들이 세 분 계셨다. 그들과 직접 말을 섞진 않았지만, 나보다 먼저 그들이 떠나고 책방에 계신 분께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유야 어쨌든 강정포구에서는 해군기지를 만들기 위한 대규모 공사가 쿵쾅거리는 소음을 내뿜으며 이뤄지고 있고 마을에서는 이를 끝내 막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낸 책들이 끊임없이 모이고 있었다. 모인 책을 적절히 보관하기 위해 또 다른 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모였으니 운동회도 하고 잔치도 벌이고.  

해군기지를 지어 미래에 있을 위험에 대비를 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안보, 그러니까 평화로운 삶을 위한 것일 텐데 과연 그들은 궁극적 평화에 대한 인식으로 기지를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기지가 정말 궁극적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까? 해군기지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진짜 평화를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평화책방을 비롯해 강정마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곳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궁극적 평화를 지지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 분명치 않은 미래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평화가 짓밟혀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 라는 이름의 폭력은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폭력은 이름만 달리한 채 우리의 삶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책방에 계신 분은 내게 물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셨어요?”

“그냥요, 오고 싶었어요.” 


책방을 빠져나와 신발을 고쳐 신고, 가까운 슈퍼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 마시며 서귀포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렇듯 밤은 차갑게 찾아왔다. 그리고 이내 아침이, 볕이 밀려올 것이다.  



끌로드 모네

예술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지만 상대적으로 그림을 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막연함, 그러니까 결국 빠리로 흘러들어갈 막연함만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내게는 더욱 합당하다. 좋아하는 수화 김환기가 진작에 떠나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던 곳, 고암 이응노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곳, 빠리 말이다. 빠리에 대한 환상은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보들레르, 플로베르, 랭보, 까뮈, 로맹 가리,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 때문에, 프랑스 전체로 보는 게 마땅하나, 빠리에 대한 무책임한 환상은 커져만 갔고 언젠가는 꼭 빠리에 살아볼 거라고 여전히 생각과 희망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제법 오래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날, 숙소 체크인 시간이 여유있게 남아 공항에서 탄 버스가 박물관섬을 지나치는 걸 보며 잽싸게 벨을 눌러 내렸다. 정차할 때 버스가 기우뚱 기울어지며 승객이 내리기 편하게 하는 기분 좋은 하차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하늘 관문, 테겔공항은 베를린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버스를 잡아 타고 풍경을 대충 흘려보내다 보면 어느새 베를린에 진입해 함부르거 역사驛舍도 보이고, 브란덴부르크도 지나치고, 박물관섬을 관통해 알렉산더 광장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환상적인 햇살이 사방에서 인사를 건넨다. 이곳이 베를린이라고, 거리는 활기에 차 있고 사람들 표정은 밝디밝다. 곧장 박물관섬으로 가도 되지만 우선 벤치에 앉았다. 숨을 고르고 물을 조금 마셨다. 

눈부신 베를린, 한눈에 보아도 관광객이 즐비했다. 박물관섬이라는, 구박물관, 신박물관, 구국립미술관, 보데박물관, 페르가몬박물관 등 5개의 오래되고 유명한 박물관들 때문일 것이다. 딱히 반드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선 그쪽으로 가 훔볼트박스에서 뮤지엄패스를 구입했다. 그리고 드넓은 잔디밭에서 공기를 만끽하고 구국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후회를 하지만 당시에는 뮤지엄패스를 구입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경제 논리에 의한 것인데 도시에 머무를 닷새 동안 세 곳 정도의 미술관에만 가도 본전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3일 유효기간에 24유로. 대부분의 미술관 입장료는 10유로가 넘는다. 하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하루에 두 곳, 아니 한 곳을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경제 논리에 휩싸여 패스를 맘껏 쓴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로부터 여행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물론 미술관을 다닐 목적의 여행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 어떤 목적도 지니지 않은 나로서는 어쩌면 어디로든, 계기만 있다면 휩쓸려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의 어리석음에 단단히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쨌든 


미술관 2층은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 공간이었는데 넓지 않은 그곳을 천천히 둘러보다 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고갱, 고흐, 마네, 세잔느... 그리고 끌로드 모네. 대중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없어서인지 대부분의 관람객들도 그저 스치듯, 오히려 그림보다 유명한 그들의 인쇄된 이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듯했다. 나 역시 그렇게 무감각하게 그림들을 훑고 있다가 뭔가 쿡 찌르는 느낌이 드는 색을 마주했다. 그림은 명확한 무엇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 그저 평범한 자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 닮았으나 닮지 않은 듯한 독특한 색감을 지닌 채 내 시선을 강하게 붙잡았다.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옅고 투명하다고 할까. 분명 아름답지만 왜곡된 색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실제 자연의 색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내가 만일 조금의 재주가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모네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모네의 그림은 내 맘 깊숙이 전해졌다. 미술관 전체를 급하게 둘러보고는 인상주의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다시 2층에 갔을 때 모네의 그림은 처음과 꼭 같은 정도로 내게 다가왔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모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후 암스테르담에 가서도 모네의 그림 몇 점을 더 보게 되었는데 대체로 그의 그림은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제목 하나 제대로 아는 그림이 없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그 느낌에 강하게 사로잡혀 돌아오자마자 열화당에서 펴낸 모네의 화집을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씩 천천히 그를 알아가고 있다. 


*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뮤지엄에도 모네의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는데, <The rocks at Belle-lle, the wild coast>에는 이런 설명이 곁들어 있었다. 

Van Gogh regarded Monet as the master of the modern landscape. 


**

만일 언젠가 내게 빠리에 살게 될 기회가 찾아온다면, 빠리의 미술관들을 하루에 한 층씩 천천히 둘러보며 그곳에 있음을 실감하고 싶다. 



너븐숭이

제주 시내에서 파스타를 사 먹고 기분 좋은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맥주까지 마신 후 제주에선 조금 그을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천으로 향했다. 손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들려져 있었다. 시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대섬입구에 내려 올레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걸어 연북정에 가고자 했다.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싶었다. 바람, 제주의 잊을 수 없는 바람 - 4년 전 제주를 처음으로 다녀간 후로 나는 늘 제주의 바람을 그리워했다. 

구름은 하늘 가득했지만 곳곳에 보이는 하늘의 맨살은 지독한 가을 하늘이었다. 바람은 바닷가로 밀려갈수록 사납게 반가웠다. 바람을 카메라에 담는 법은 나로선 영상뿐이었다. (이것을 김영갑은 파노라마에 훌륭하게 담아냈지, 평생에 걸쳐) 반가운 제주의 풍경을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연북정에 닿았다. 주위로 낮게 둘린 담을 조금 서성이고는 연북정에 올랐다. 정면이 열린 세 개의 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시원했으나 안타깝게도 마루는 관리의 손길이 자주 미치지 못한 듯 낡아 보였고 한 곳은 크게 파손 되어 있었다. 정자 근처에 마련된 돌로 된 벤치에 앉아 책을 좀 읽다가 너븐숭이로 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서두르라고, 바람이 곁에서 속삭이듯 밀려왔다. 





오후가 깊어가기에 걷기엔 조금 부담스러워 다시 버스를 잡아탔다. 제주 일주버스는 노선이 긴 시외버스라서 버스를 탈 때 행선지를 말하고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버스에 오르자마자 내가 너븐숭이에 간다니까 기사분이 잘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류장 이름을 두 번 거듭 말하니, 주변에서도 알아챘는지 너븐숭이기념관이라고 한마디씩 거들었고 결국 그제서야 요금을 지불했지만 평소 기념관이라는 단어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기분이 더욱 쳐지는 듯했다. 기쁘게 돌아보거나 축복해야 할 일을 기념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전쟁이나 학살 같은 뼈아픈 역사적 사건에 기념이란 단어를 더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고 불경하다. 어쨌거나 너븐숭이기념관으로 간다. 제주 어딜 가나 마주쳐야 할, 마주칠 수밖에 없는 4.3은 너븐숭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조심스레 무단횡단을 해 기념관으로 갔다. 주차장은 좁았고 몇 대의 차가 있었지만 막상 기념관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리 큰 곳은 아니지만 천천히,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너븐숭이가 있는 조천읍 북촌리는 4.3 때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주민이 학살된 지역이다. 기념관 안내서에는 1949년 1월 17일 300여 명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이 사건은 유신시절,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으로 다루면서 침묵의 금기를 깨고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작가는 소설 발표 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이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동안 제주민들을 비롯해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강요받았고 쉬쉬해야만 했던 오랜 침묵과는 또 다른 침묵을 감내해야 했고, 이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여 무슨 오해라도 살까봐 4.3을 쉬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3사건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조천에 왔으면 마땅히 너븐숭이를 들러야 진정한 답사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홍준) 


기념관을 빠져나와 너븐숭이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당시 희생된 아이들 돌무덤 몇 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너븐숭이와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는 곳. 특히 문학비가 있는 곳은 널브러진 비석에 소설의 대목을 새겨놓아 비석마다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새겨진 글들을 읽으며 참배하듯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곳이다. <순이삼촌>을 이미 읽은 나는 비석에 새겨진 글들을 꼼꼼하게 읽진 않았지만 지나는 자동차 소리에 파묻혀 진지하게 지난 시간들을 애도했다. 


이제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려 하니 어느새 멀리 노을이 시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구름과 하늘은 더욱 돋보였고 점점 짙어가는 노을빛은 북촌을 더욱 깊이 각인할 수 있게 도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며 수없이 발길을 멈춰 시간을 담았고 공간을 기억하려, 오래 오래 기억하려 애썼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Edition of Contemporary Music

ECM이 레이블이란 걸 알게 된 것부터가 ECM과의 인연의 시작이자, 현재로서는 명확한 전부다. 이제 시작했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레이블의 음반을 듣게 될지, 장담하긴 어렵다. 지금은 내 방에 붙어있는 ECM의 전시 엽서를 본 건,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선희>를 보러 간 씨네큐브에서였다. 문화원에 다닐 때만 해도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수시로 씨네큐브에 내려가 영화 정보를 얻어 돌아오곤 했는데, 씨네큐브에는 반드시 영화 정보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문화 정보들이 이따금 비치되어 있어 늘 대할 때마다 모두 접하는 건 아니어도 반가워하곤 한다. ECM 전시 엽서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리고 전시 타이틀은 아름답지만 다소 거만하게도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어수선함을 빌미로 시간이 훌쩍 달아나 버렸고 이미 전시는 한 주만 남은 상태였다. 

전시 홈페이지도 가보고, 레이블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무엇보다 레이블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척 맘에 들었다. 비록 아는 뮤지션이라고는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뿐이었지만, 단 한 명만으로도 레이블의 수준이 가늠이 되는, 그래서 전시에 가고픈 마음이 치솟았다. 

(아마) 일반 대중에겐 다소 생소한 레이블일 테고, 역시나 생소한 음악 전시여서 전시장이 조용할 거라 생각했던, 그래서 여유 있게 전시를 즐길 수 있을 거란 내 기대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무참히 깨져버렸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것부터가 전시의 시작이었다. 지하 4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름다운 영상이 하늘하늘 나풀거리듯 흔들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낮게 깔린 음악과 하늘거리는 풍경이 지배했다. 발길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한 채 음악을 무심코, 그렇지만 차분하게 흘려보냈다. (이런 게 음악을 전시하는 거구나) 기분 좋게, 시작부터 지배당한 마음은 전시장에 있는 내내 지속되었고 눈과 귀는 어쩔 수 없이 황홀해졌다.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과 ‘키스 자렛’부터 연도별로 발매된 음반들이 벽에 붙어 치솟아 있는 감상의 공간까지, 전시장은 꽉 채워져 있었다. 아쉽게도 편하게 누워 음악을 감상하고자 했으나 붐볐고 자리가 없었다. 키스 자렛 코너에서 헤드폰을 만져보지도 못한 건 유독 아쉬웠다. 하지만 층을 올라가 이어지는 전시들이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트렸는데, 뮤지션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설명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고, 앨범 커버들이 새로운 하나의 작품처럼 눈부시게 다가왔다. 전시 주최 측에선 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앨범 커버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공간을 곳곳에 배치해 때마다 궁금증이 사라지게 해주었다.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보며, 고다르의 이름도 보고 중간 중간에 암실처럼 배치된 공간에서는 앉아서 영상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머리를 퉁 치는 충격과는 거리가 먼, 한순간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동시에 쓸쓸해지는 전시는 세 번째 <풍경과 마음>이었다. 널찍한 공간에 직각으로 프로젝트를 쏴 허전한 풍경들을 애처롭게 쏘아댔다. 물론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바닥에 퍼질러앉아 흘러가는 영상과 음악을 하염없이 보고 들으며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 거대하고 흐릿한 화면과 분위기만 어렴풋 떠오른다. <풍경과 마음>과 같은 층 구석에는 또 하나의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이곳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조명, 바닥에 방치된 넉넉한 쿠션, 최상의 오디오시스템. 아마도 디지털기기로 인해 내 저렴한 귀가 가장 호화로웠던 순간은 이때였으리라. 사운드가 정말 너무 맑고 좋았다. 전시 마지막으로 갈수록 레이블의 드러난 스타가 아닌 숨은 고수를 전면에 등장 시키는 공간이 지배했다. 사운드 엔지니어를 비롯해 레이블의 창립자인 만프레드 아이허까지. 무엇보다 전시의 마지막은 만프레드가 레이블을 운영하며 추구해온 수많은 가치와 실험 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있었다. 이제껏 세 시간이 넘도록 눈과 귀로 직접 경험한 모든 것들이 그러한 가치를 실험했던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일 터였다.  

전시를 다 보고 들어간 아트숍에서는 ECM의 음반들을 비롯해 포스터, 엽서, 책에서부터 티셔츠까지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모조리 쓸어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게 많았지만 모조리 쓸어담지 못해 그저 쓸쓸히 전시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오래 머물수록 위험한 법. 특히, 전시장에서 내내 훌륭한 음악을 훌륭한 사운드로 들려주었던 피아톤의 헤드폰에 더욱 눈과 손길이 갔지만 의도적으로 욕망을 억제했다. 물론 다분히 현실적인 억제였다. 


제주

오랜만에 회식을 했다. 

인계동이었고, 폭탄주였다. 언제나 그렇듯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는 졸고 있었다. 깨어보니 대로, 택시를 잡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사당역이라 하고 일행은 서울이라 한다. 이미 협상 타결. 미터기를 누르지도 않은 채 뒤에 타겠다는 나를 기어코 앞자리에 밀쳐넣으며, 그렇게 회식은 끝이 났다. 기억나는 건 동수원IC, 그리고 동대문이었다. 내비를 찍고 달린 기사분은 내비가 가리키는 대로 동대문으로, 밀리고 밀리는 밤의 동대문 한가운데로 진입하고 있었다. 멀리 흥인지문이 보였다. 


저를 깨우지 그러셨어요, 그럼 이쪽으로 안 왔을 텐데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 미터기를 누르지 않은 채였으니, 그리고 주머니엔 수원에서 일행이 찔러둔 두툼한 돈뭉치가 있었으니. 

대학로를 지나고, 아파트숲으로 진입해 집에 도착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각이었다. 느즈막히 주문한 제주편 답사기는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바람을 쐬고자, 빌린 책을 가지러 성신여대역으로 잠깐 나갔다. <미각의 제국>, 정바비가 추천해 서점에서 얼핏 본 그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글자도 또렷하고 무게도 가볍다. 챙겨야지. 


그렇다. 

이렇게 아침부터 눈을 떠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곧 제주에 갈 몸이다. 제주, 4년 전, 처음 그곳에 발을 내딛던 때 생각이 난다. 준비없음 은 언제나의 여행에 버릇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내게 준비된 거라곤, 미리 예매한 공연 티켓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뿐이다. 답사기를 1~3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생에게 줘 버렸고, 다시 전체를 모으고 싶지만 국내를 돌아다닐 때, 기록을 하며 맘 먹고 돌아다닐 때마다 한 권씩 구입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제주다. 


제주 아일랜드 


바람, 제주의 바람을 잊을 수 없다. 4년 전, 스프링쿨러가 기르던 벼의 빛깔을 잊을 수 없다. 올레길의 운치도, 일출봉의 낯섦도, 한라산의 압도적인 웅장도 모두 잊을 수 없다. 


티머니 카드를 챙겼다. 버스를 타고 흔한 풍경들, 흔하지만 내겐 흔치않은 풍경들을 곱게 담아오려 한다. 



*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스테이 위드 미

대전, 대전에 마음 먹고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용산역에서 케이티엑스 열차에 올랐다. 가격은 오백 원이 오르고 맛의 값은 폭락한 좋아했던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름다운 한강철교에서의 풍경, 해 질 무렵이면 더욱 낭만에 젖곤 하는 그곳에서 어떤 날의 감상을 떠올렸다. 맥주를 금세 비우고 김중혁의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을 꺼내든다. 최근 그의 산문집 <모든 게 노래>를 너무 재밌게 읽어 그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모든 게 노래>엔 책의 앞뒤 날개에 짧은 메모가 적혀있고 이제 곧 다른 이의 손에 들려있을 운명이었다. 

한 시간. 대전은 멀게도 가깝게도 느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케이티엑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서대전역에 도착을 하니 정말 가깝구나, 란 생각이 들며 낯선 곳에 도착한 희미한 설렘이 밀려왔다. 한 손으로 들어도 가벼운 백팩을 선반에서 꺼내 열차를 빠져나왔다. 날씨는 여전히 눈부셨다. 

산호여인숙,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지도를 살피고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아 걸었다. 한밭이란 말에 걸맞게 도로는 널찍했고 시간은 여유로웠다. 가볍게 걷기에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한 도시에 도착해 그 도시에 가장 빨리 친숙해지는 법은 걷는 게 우선이라는 건 오랫동안 여행을 하며 겪어온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중구청 인근에 도착해 골목으로 들어서니 풍경이 옛스러우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듯 다가왔다. 산호다방, 이란 간판 위로는 거대한 니트(처럼 보이는 옷)가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려있었다. 왠지 산호여인숙과 형제인 곳은 아닐까 란 생각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골목을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찾은 산호여인숙 입구 벽에도 산호다방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옷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옛 골목에서 익숙한 진한 녹색의 대문이 이곳이 산호여인숙입니다, 라고 레고의 표정을 지으며 반기고 있었다. 

멀리서 봄이 불렀다. 잘 찾아왔네요. 계단을 오르니 이곳이 문화공간임을 표방하는 각종 전시물들이 가득했다.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1층에 있는 각각의 방들엔 어슴푸레 예술의 물감 향이 은은히 번지고 있었다. 1층에는 남자 화장실과 욕실, 내가 이틀간 묵을 방은 2층에 있었다. 이름하여 ‘내방’. 자그마한 방엔 귀여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철재 이층침대가 앙증맞게 놓여있었다. 그뿐이었다. 

봄과 여인숙의 안주인은 서로 아는 사이였고, 내가 방을 예약할 때 안주인은 내가 묵을 2인실에 미리 예약한 한 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하룻밤을 묵게 된 셈이다. 그 사실을 여인숙에 도착하자마자 안주인이 내게 해주었는데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던 나는 ‘내방’ 문을 열자마자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늘 이 방에서 묵게 될 또 한 명의 사내는 바로 ‘나’였음을. 


공연장의 밤은 금세 찾아왔다. 봄과 잔디밭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공연장에서는 처음 듣는 곡들이 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공연장으로 들어가 뜨거운 감자의 공연을 보았다. 김C는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땡-큐 라고 끊어지듯 말을 하고는 뜬금없이 무대 밖으로 나가더니 앵콜 요청이 무색하게도 다시 무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이발관의 공연. 공연장의 사운드는 썩 좋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능룡의 기타 연주는 제법 또렷하게 들여왔다. 사운드가 좀 더 청명하고 우렁찼더라면 슈팅스타와 나를 잊어나요, 불우스타가 그토록 싱겁게 느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결국 공연은 좋았다. 마치 여행에서 개고생을 하거나 좋았던 기분에 비하면 안 좋았던 날들이 지배적이더라도 돌아오면 그래도 좋았어, 하는 것처럼. 삶을 지탱하기 위한 기억의 노림수.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어둠이 퀭하니 덮쳐왔다. 갑천의 물은 소리 없이 흘렀고 드문드문 자동차는 소리 내어 달렸다. 운이 좋게 잡은 택시를 타고 9000원 어치를 달려서야 여인숙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며 힘껏 닫은 문에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택시는 이내 사라졌다. 다시 못 탈 택시이고 다시 오지 않을 하루였다. 


아침, 일찍 깼지만 일부러 약간의 게으름으로 침대에 머물렀다. 그러다 기어코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 휴게실 소파에 앉아 지난 여행의 기록들을 훔치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8월 31일, 갑작스럽게 입원한 서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나는 대전이고 비보는 봉화였으며 이미 생生이 아닌 사死가 되어 버린 할머니는 서울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회기에 갔다. 병원 앞에 있는 슈퍼에서 포도 한 박스와 맥주 한 캔을 샀다. 정문 근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막연함을 생각했다. 컴컴한 바다가 이미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위독한 상태였고 다들 죽음을 준비하는 분위기였다. 왠지 억울하고 덤덤한 마음을 다잡고 병실로 올라갔다. 가족들은 식사를 하러 간 뒤였고 나와 할머니만 남았다. 간병하는 아주머니는 내가 할머니 옆을 계속 지키고 있으니 부담스러운 눈치였으나 나 또한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아주 어릴 적, 내가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나를 예뻐해주던 할머니였기에, 그랬던 따스함으로 이제는 완연한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자니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툭 하고 부러질 듯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툭 하고 부러지지 않을 유연함이 내게 있었던지 눈에 한가득 눈물이 고였으나 그 눈물은 결코 중력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던 게 아니라 울 수 없었다. 그랬던 할머니가, 내 결혼은 꼭 보고 싶다던 할머니가 입원한 지 겨우 한 달여만에 돌아가셨다. 어떤 지독한 슬픔보다 묵직한 무언가가 서서히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며 순식간에 생이 허무해진다. 


이응노미술관. 그저 처음이기에 막연했던 대전에서 유일하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고암 이응노의 미술관이었다. 그의 예술을 모르지만 미술관 건축을 통해 그를 어렴풋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전한 옛 충남도청 근처와 대흥동 일대를 얼씬거리다 여인숙에서 주인장과 봄과 함께 집밥을 먹고 호화롭게 핸드드립 커피까지 얻어 마신 뒤 여인숙을 나섰다. 한밭수목원 사이의 움직이는 거대한 쉘터 옆엔 낮게 웅크린 이응노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뒤로 접근했기에 미리 전체를 보지 못했고, 하늘을 향해 정교한 콘크리트 조각이 일정한 간격으로 덧붙여진, 그래서 햇살이 마치 빗살무늬처럼 밀려 들어오는 측면 입구를 통해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야트막했지만 외부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창들이 밖과 안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다. 입장료는 고작 500원. 아직 청소년 나이인 봄은 300원. 로비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작품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도쿄, 서울, 대전, 빠리 - 그가 작업을 했던 지역으로 구분을 해 전시를 하고 있었다.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공간감이 좋은 미술관은 더없이 한적했다. 천천히 그의 작품을 보다 연혁에 기록된 동백림 사건에서 멈칫했다. 어쩐지 동백림 이란 단어가 머리에 들어오자 멀리 빠리에서 생을 마감한 고암의 삶이 더욱 치열하면서도 불행하게 생각되었다. 암울했던 그 시절, 고암 역시 희생되었고 그로 인해 늘 그리워 했을 조국과 더욱 멀어졌으니 이제와 그를 높이 기린다고 해서 지난 설움이 가실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그의 정신과 작품세계를 상시로 확인할 수 있게 됨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기는 선선했다. 약간은 피로했던지, 그저 아해들이 뛰어노는 잔디밭에서 누워 쉬고만 싶었다. 잔뜩 흐린 하늘은 구태여 그늘을 찾는 수고를 덜어주었고, 가까운 매점에서 돗자리를 산 우리는 한적한 잔디밭 구석에 앉고 누워 쉬고 또 쉬었다. 그렇게 앉고 누워 쉬며 대전은 참 살기 좋은 곳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타슈~, 타슈를 빌리는 긴 줄을 기다리는 동안 앞 사람들의 거듭된 실패를 보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장이 헛되면 안 되기라도 하듯 나는 한 번의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여튼, 빌린 자전거의 안장을 최대한 높이고 천천히 늦은 오후의 공기를 가르며 달렸다. 자전거 도로는 있었으나 좁았고 울퉁불퉁했으며 안전하지 않았다. 타슈는 좋았지만 자전거 도로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이기만 했다. 

봄의 아는 언니가 하는 커피집에 들러 쉬며 얼떨결에 쟁반짜장을 먹게 되었다. 이미 공연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련하게 져 가는 해를 보며 저녁을 맞이했다. 금세 어둠이 밀려왔다. 


비돌, 이란 술집은 충분히 맘에 드는 곳이었다. 생맥주 맛도 좋았다. 선곡은 당연하다는 듯 맘에 들었다. 그렇게 대전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다. 


일요일, 일찍 일어나 2층 男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가방을 챙겼다. 스르륵, 방을 나와 휴게실에서 잠시 쉬다 산호를 빠져나왔다. 대문을 나서 골목 어귀를 돌 때까지 두 번 정도 뒤를 돌아보았다. 정을 주고 싶은 공간이다. 

걸었다. 열차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누나를 위해 성심당에서 튀김소보로를 사고도 시간은 충분했다. 다시, 대흥동 일대를 걸었다. 어제의 비돌 근처와 주택을 개조한 앙증맞은 프랑스문화원을 지나며 다시금 대흥동을 마음에 새겼다. 꼭 다시 오리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늘 어딘가에서 신선한 기운으로 충전을 하고 나면 일상적 삶에서 다른 것을 도모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이 들곤 한다. 당시의 에너지 그대로 삶에 쏟아부울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런 착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기에 나는 너무 나약해져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겐 또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그건 제주가 될 수도 있고 속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13. 10. 4. ~ 6. 


라떼

커피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로스팅을 하는 곳이면 드립커피를 마셔왔다. 가장 좋아하는 커피집은 성북동의 일상常, 몇 년 전부터 - 그러니까 일상을 안 이후 줄곧 - 집에서 내려 마시는 원두는 늘 일상의 몫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시엔 커피를 잘 모를 때이기도 한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커피집이 가득한 요즘 다니며 마셔봐도 일상만한 맛을 선사하는 곳은 없다. 

베를린에서는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라떼나 카푸치노를 마신다. 그들의 맥주가 그렇듯 가득 거품이 인 그러한 커피를 다들 마시더라. 천연덕스럽게 맥주를 즐기며 커피 생각이 날 때면 역시나 그냥 커피kaffee를 마시곤 했는데, 우리처럼 거대하지 않고 옛 다방에서나 볼 수 있을 크기의 사기잔에 약간은 진하게 내린 맛이 일품까진 아니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베를린 외곽에 있는 미술관(Sammlung Scharf-Gerstenberg)에 갔다가 그곳에 딸린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약간은 무의식적으로 라떼를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라떼를 내가 마셔본 일이 있는지도 가물거리는 순간이었다. 동전으로 값을 지불하고, 역시나 앙증맞은 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야외테이블에 자릴 잡았다. 참, 그곳은 일반 커피와 라떼 종류의 가격이 같았던 걸로 기억한다. 

천천히 한 모금. 커피를 덮고 있는 하얀 거품이 윗입술에 가볍게 묻어날 정도로 천천히 또 한 모금. 맛은 특별하지 않았으나 그 순간 묘하게도 기분이 좀 더 베를린에 친숙하게 되었달까. 라떼를 마시며 기억하는 누군가에게 엽서를 썼다. 

이후 암스테르담에서도 두 번 정도 라떼를 마셨는데 역시 그윽한 거품이 일품이었으나 맛은 평범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커피맛도 나.쁘.지.않.다. 

여행에서 돌아와 반복된 일상을 헤매다 문득 라떼를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면 자연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을 떠올리게 된다. 아니 모르겠다. 여행의 기억이 우선인지 라떼가 우선인지. 하지만 돌아와서 아직까지 라떼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사진이란 진부한 소재 대신 여행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는 게 흥미롭다. 맥주, 맛있는 맥주가 그리울 때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을 떠올리는 것과 아, 라떼 하며 그곳을 떠올리는 것 사이엔 오묘한 차이가 있다. 그곳의 라떼는 특별한 맛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여행의 전반을 떠올리게 하고, 그럴 때면 아직 가까이 머무르고 있는 기억에 여전히 라떼의 거품이 간직한 것과 유사한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있어 그리움이라 표현하기엔 아직 이른 손에 잡힐 듯함이 약간은 생생하게 전해지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라떼를 마시고 싶다. 


맥주

진부하지만, 맥주 얘길하지 않고 독일과 네덜란드를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맥주를 좋아하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 국한된 얘기이긴 하겠지만. 

내일은 추석, 넓은 시골집에 비해 이제는 많이 썰렁해진 추석 연휴를 맞이하자니(따지고 보면 시집을 간 누나가 빠진 것뿐인데) 뭔가 길고 긴 연휴가 시시하면서도 반갑고 느긋해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며 책을 읽다가 노래도 듣다가 엄마가 맥주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사둔 하이트를 마시기도 하다가, 지겹고 덥기도 해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천막을 쳐둔 마당에는 방금 비운 맛없는(!) 맥주 잔과 방금 다 읽은 김중혁의 산문집과 셔플로 틀어둔 아이튠즈에서 흘러나오는 2046의 사운드트랙 Adagio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을 지배하는 넉넉한 오후가, 있다. 

그래, 맛없는 하이트맥주를 마시다 보니 맥주 생각이 아니 날 수 있나? 그래,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에서 마셨던 맥주 생각이 아니 날 수 있느냔 말이다. 

맥주가 술이고 술이 아니고를 떠나, 지독했던 여름을 힘겹게 위로했던 맥주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여름의 한가운데 떠난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에서의 맥주 - 맛을 잊을 수 없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그곳 로컬인 암스텔비어와 유명한 하이네켄과 밤에 지나다 들른 곳에서 마신 생맥주가 전부지만 베를린에서는 주로 병맥주이긴 했지만 닥치는 대로 다양한 맥주를 맛보았다. 벡스나 베를리너 필스너, 에딩거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많은 맥주를 마셨다. 






끼니는 걸러도 맥주를 거르지 않았던 열흘이었다. 터키항공 비행기에서는 터키맥주를 마셨고, 여행을 하는 동안은 낮엔 햇살과 기분이 좋아 마시고, 오후엔 오후 특유의 고즈넉함이 좋아 마시고, 저녁엔 안 마실 수 없어 마시고, 밤엔 마시는 게 자연스러워 마셨다. 그곳의 밤은 늦었다. 그러니까 오후와 저녁이 길었다. 9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해 10시는 돼야 비로소 밤, 가까스로 밤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여행자의 입장에선 그런 시간의 흐름이 무엇보다 반가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여행자로서 갈 수 있는 많은 장소들 대부분은 일과시간에 맞춰 오픈을 하니 따지고 보면 별 메리트가 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마시고 마시고 마시다 보니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지만 우리나라의 맥주는 맛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는지 몰라도 우리나라 맥주가 맛이 없다고 하며 수입맥주를 주로 찾는데, 나로서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정말 우리나라 맥주가 그렇게 맛이 없나,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의 맥주가 확실히 맛있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야 비로소 내겐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맥주가 맛이 없는 ‘편’이 된 건데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그래도 슈퍼에 가면 드라이나 맥스, 카스를 산다. 그냥 그게 여러모로 편하다. 

베를린에서는 주로 자전거를 타며 일상을 누볐기에 열심히 달리고 달리다 목이 마르면 슈퍼에 들어가 시원한 병맥주를 사 마시곤 했다. 그게 아니라면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당연히 맥주를 시키곤 했고(미술관 가는 길에 우연히 들린 피자가게에서 마신 에딩거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반면, 암스테르담에서는 주로 걸어다녔기에 눈에 밟히는 가게가 있으면 슬쩍 들러 생맥주를 한두 잔 마시곤 했다(아, 암스텔비어의 짜릿한 그 맛). 그러다 암스테르담에서 매일 들르곤 하던 프렌차이즈 슈퍼가 있었는데, 숙소 앞에도 있고 암스텔 곳곳에 있어 늘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암스텔비어 팩을 사서 숙소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침에 숙소를 나서며 한 캔을 들고 나가 잔디밭에서 마시고,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한 캔을 마시며 하루를 돌아보는 그런 과정이 내게 잔잔한 행복을 선사했다. (하이네켄이 조금 더 비싸긴 했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싼 편인데 한국에서도 흔한 그것보다는 로컬비어인 암스텔에 더욱 손과 입이 갔다, 그립군) 


 

모든 게 노래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밤, 서촌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교보에 들렀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선물할 <가장 보통의 존재>와 새로 나온 김중혁의 산문집 <모든 게 노래>를 샀다. 표지가 노란, 디자인이 앙증맞은 책이다. 

연휴를 맞아,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책을 읽고 있는데 쏠쏠한 재미가 있다. 그 쏠쏠함이라니, 그가 음악을 좋아하며 자란 이야기나 간간이 소개해주는 음악들을 바로 찾아 들으며 읽는 그런 재미. 연휴가 긴 탓에 몇 권의 책을 챙겨왔는데 가장 따끈따끈한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것 같다. 깨알 같은 재미로 가득하다. 그가 직접 그려 곳곳에 삽입한 그림도 심플하고 그에 덧붙인 말끔한 글씨는 약간 사랑스럽게까지 하다. 


일본 출신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한다. 그를 알게 된 건 순전 우연으로 가득하지만,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좋아하게 된 건 순수 내 몫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엔, 아련한 서사가 있다. 격정은 없지만 잔잔한 감동과 이야기의 묵직함이 있다. 시선이 덤덤하면서도 따스하다. 뜬금없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얘길 꺼낸 건 왠지 그가 떠올랐기 때문인데, 가즈오의 책을 읽으면 쿡쿡 찌르는 직접이 있진 않지만 한참을 읽다 스토리를 곱씹어보며 시간을 우회하여 느끼게 되는 은근한 간접이 있다, 이런 유사 느낌을 김중혁에게서 - 비록 산문이지만 - 느끼고 있다.


<모든 게 노래>를 읽고 있는 지금 작가의 소설집을 하나도 읽지 않음이 아쉬움으로 다가오면서도 한편 새로운 소설가를 ‘발견’하였다는 기쁨이 든다. 

작년, 가을방학의 연말 공연에 갔을 때 공연 사이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김중혁 작가가 초대손님으로 나와 가벼이 토크를 하고 그의 소설집 몇 대목을 낭독해주었다. 김중혁이란 작가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한동안 작가의 존재를 잊고 있다가 이동진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에 게스트로 나오길래, 소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아는 작가가 나온다는 반가움이 약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책이 이번 책 <모든 게 노래>인데 아무래도 음악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나이기에 관심이 갔고, 그런 중 약간 맥주의 기분으로 서점에 들르니 별 망설임없이 구입하게 되었는데 재밌게도 계산대로 가기 전 읽은 한 편이 ‘맥주는 술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이다. 


올 초, 만난 그녀는 노래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너무 시끄럽다며, 자기는 클래식이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수긍하는 순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며 여전히 ‘너무 시끄러운’ 음악을 수시로 듣는 나는 그때 그 시간을 돌이켜본다. 세상엔 무척 다양한 음악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세상 곳곳에 퍼지고 흐르며 우리의 삶을 비로소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 지금 그녀와 나 사이 형성된 까마득함에도 시간의 노래들이 흐르고 있음을, 결코 만져질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김중혁이 안내한 노래의 세상으로 조금씩 발을 들이며, 아냐 노래는 시끄러운 게 아냐 - 수긍할 수 없음을 대상 없이 노래한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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