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나의 닻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1968. 4, 김수영>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처음 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것이 시인 줄로만 알고 제목이 뭐였더라 - 그러면서도 구글링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전집을 뒤져 찾으려 했고 실제로 찾다가 못 찾아 결국 구글링한 뒤 알게 되었다 - 하며 종일 크게 다급하지 않은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시에 시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하루이기도 했다.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전집, 산문과 시로 구성된 두 권의 책 표지는 시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POET Soo Yung KIM 詩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씌여 있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샀을 때, 그래서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닻'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았다. 저 문장이 좋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어 자체가 주는 특수한 느낌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정도로 내 맘을 사로잡는다. 

흡연자들이 새해가 되면 담배를 끊어야지 하는 것처럼 나는 특별할 것 없어, 하며 짐짓 말하면서도 구정 무렵이 되어 음력으로도 분명하게 해가 바뀜이 온몸으로 전해지면, 뭐든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글을 쓰고 싶다는 뻔하면서도 새로운 앞선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은 늘 막연하고 거대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경이로울 정도로 오늘은 사무실에서도 왠지 모를 의욕이 앞서고 다르게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거란 들뜬 기대가 머리와 가슴에 진동하며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이 느낌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정도의 세기였고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팔팔할 때, 모든 게 보다 분명하고 눅눅하지 않을 때, 그래서 느낌을 가능한 쾌적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의지가 선명한 지금 이 순간을 단단한 줄에 매어 붙들어 두고 싶은 것이다. 마치 '닻'이 배를 그렇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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